준수가 할 말 있대

2026. 03. 14 준쟁온리전2 발간 엽편 일부


위로 하나

 

 

너는 마음이 강해서 울지를 않잖아. 나만 맨날 쪽팔리게 니 앞에서 질질 짜고.”

“······.”

근데, 재유. 너도 혹시 위로 같은 거 필요하냐?”

 

부러 옆자리에 앉아놓고 재유는 골대만 응시했다. 풀어내고 싶은 속엣말이 많을 것인데 하여간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오래 보았다고 이제 그런 건 알 수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대신 입을 열었다.

 

해주면 좋지. 싫은 사람이 있겠나. 좋은 말 해주겠다는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말투는 항상 진심을 가린다. 그런 거 말고 네가 얼마나 절박한 지가 궁금한 건데. 그런 속내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내 마음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진재유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거라고. 그리고 그 순간이 지금일 거라고. 나는 재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라.”

 

그 뒤에는 조금 먹먹한 소리였다.

 

눈물 날 거 같잖아···.”

 

나는 재유처럼 다정한 말을 건네는 재주는 없어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울어. 재유는 답하지 않는 대신 맞닿은 어깨에 이마를 살짝 부볐다. 워낙에 조용한 애라 우는 건지 아닌 건지 티는 잘 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떼어내 그만 물러나지는 않았으므로 역시 재유에게는 이 품이 필요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재유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는 동안 이상하게도 재유에게 위로받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재유가 내 속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때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올 것도 같은, 신기하고 기묘한 기분이었다.

 

,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내 등을 두드려줬는지 알겠어. 너는 내가 안쓰러웠구나. 가만두질 못할 만큼.

 

재유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게 좋았다. 너도 내가 되어 봐.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감각이 어떤 건지 느껴봐. 나는 그게 너라서 좋았어. 너는 어때? 재유를 안아주는 일은 몇 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리 없이 우는 재유의 끓는 마음을 나는 오래도록 두드려주었다.

 

 

 

 

 

 

외계인의 고향

 

 

고등학생 때 꿈에 진재유가 나왔다. 현관에서 운동화 끈을 매던 재유는 추석이라 본가에 간다고 했다. 나는 그 뒤에서 김해?라고 물었고 신발을 다 신은 재유는 일어서며 답했다.

 

아니, 화성.”

 

뒤돌아선 재유가 문을 열자 우주가 펼쳐졌다. 놀라 멍하니 입을 벌리는 내게 재유는 간다, 나중에 보자. 그런 인사말을 남기곤 별천지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팍 뜨다 천장의 형광등 빛에 다시 눈을 찌푸렸다. 그 상태로 몇 번쯤 깜빡거리는 사이에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이젠 하다 하다 별 거지 같은 꿈을 다 꾸네······.

 

또 꿈꿨나.”

 

머리를 벅벅 긁고 있던 그때 옆에 있었는지 재유가 물었다. 재유는 여느 때와 같았다. 잠옷으로 입는 검은 나시에 떠나기 전과 같은 말간 얼굴. 꿈의 주인공을 불쑥 마주하자 황당했던 기분이 가라앉으며 문득 유쾌해진다.

 

, 니가 본가 간다면서 화성 가는 꿈.”

 

그래서 나는 재유에게 꿈의 내용을 말해주었다. 네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꿈이지 않느냐고, 나는 피식 웃었지만.

 

······.”

 

따라 웃을 줄 알았던 재유는 알 수 없는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입을 다물고 재유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에도 재유는 더 말이 없었다. 그럴수록 긴장되는 것은 나였다. 이상하게 재유와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나는 결국 미심쩍은 듯이 묻고야 말았다.

 

··· 외계인이냐.”

 

그러자 재유가 입술을 꿈틀거리다 이내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다 같이 모여 개그 프로그램을 볼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재유가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애도 아니고 외계인은 무슨······. 그날 재유는 눈물을 훔치며 웃었고, 나는 그만 웃으라는 말을 하다가 세수를 하겠다고 욕실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의 꿈 내용은 일종의 장난이 되었다.

 

진재유 고향 화성이잖아.”

그거 언제까지 할 건데.”

 

꿈의 내용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가, 나는 종종 재유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화성에서는 생명체가 살 수 없다는데 너는 어떻게 지구에 왔냐거나, 너도 숨겨둔 우주선이 있냐거나 하는 시시껄랑한 농담이었다. 그럴 때마다 재유는 나를 타박하면서도 짜증은 내지 않은 채 웃어넘기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자기 얘기가 아닌 것처럼 흘리듯 답을 했다.

 

화성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있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덕분에 우주 다큐도 몇 편쯤 봤다. 그 작은방에 혼자 쉴 곳은 없었으므로 재유도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을 봤고, 그러면 옆자리에 앉아 손을 내밀고는 에어팟 한 쪽을 빌려 가 나와 함께 다큐를 시청했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때때로 재유를 흘깃거렸는데 재미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우리는 졸업했지만 대학 시절, 프로 입단을 거치는 동안에도 재유의 고향에 대한 농담을 종종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 이십 대 후반에 들어섰을 때.

 

내 사실 화성인이다.”

 

호프집에서 500cc 생맥주를 마시던 재유가 그렇게 고백했다.

 

그 앞에서 똑같은 생맥주잔을 잡고 있던 나는 재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재유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꿈에서 네가 본가라며 화성을 간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예의 그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까지 말이다.

 

나는 우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알싸하고, 시원했고, 마시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맑은 정신이다.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슨 생각이냐면··· 그동안 계속 외계인이라고 장난을 쳐서 그런가. 방금 재유가 한 말도 장난일지 모르지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왜냐면 여태까지 진재유가 먼저 화성인이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장난이 지나쳤나.

 

너무 빠져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재유의 고향에 관한 농담은 우리 둘 사이에 오랜 습관처럼 자리 잡은 놀이였다. 나는 재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끔 니가 진짜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미친 생각 같겠지만.”

“······.”

넌 내가 이런 말 하면 아니라고 안 하잖아.”

 

재유는 여전히 모호한 표정이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물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어디 갈 건데.”

 

그러자 재유가 웃는다.

 

김해.”

 

나는 재유를 따라 웃었다.

 

재유에게는 어떤 알 수 없는 면이 있었다. 그가 보여주지 않는 면. 물어도 답해주지 않으면서 거짓말로 꾸며내지도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는. 하지만 그게 미치도록 궁금하지는 않다. 얘가 나랑 이런 식으로 어울려주니까. 우리는 어쩌면 이미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와 재유가 외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동안 내게 재유는 줄곧 그런 존재였으므로.

 

자정이 되어 호프집을 나섰다. 한산한 동네였으므로 거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가끔 차가 지나가는 조용한 갓길을 걸으며 나는 재유에게 말했다.

 

재유, 언제 너 떠나게 되면 그래도 말은 하고 가.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다.”

 

재유는 어쩐지 말없이 사라질 것 같은 애였으므로 선수를 쳤다. 내 말에 재유는 놀란 표정이다가 이내 푸스스 웃었다.

 

그때가 되면 니도 데려갈게.”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답을 주었다. 온갖 것을 다 물어보는 동안에도 함께 화성에 가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건넬 작별 인사 따위나 고민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즐거워졌다.

 

나 거기서 숨은 쉴 수 있어?”

그럼, 요즘 기술이 좋아가 다 할 수 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으면서도 술 때문인가 기분이 좋았다.

 

우주여행 그거 존나 돈 많은 부자들만 하는 건데 친구 잘 둬서 난 공짜로 가네.”

 

재유는 친구 좋다는 게 뭐겠냐며 웃었고, 나도 재유를 따라 킬킬 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계속해서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며 밤거리를 걸었다. 그날 밤은 밝은 달 가까이로 붉은 점 하나가 반짝이는 날이었다.

 

 

 

 

 

 

친구 사이

 

 

재유, 난 너한테 친구야?”

 

한적한 공원의 농구 코트. 앉아서 숨을 고르는 재유 곁에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공원 안에 자리한 코트는 평일이라 그런지 비어 있었고, 오랜만에 만나 산책을 하던 재유와 나는 버려진 농구공을 발견하고서 점수도 정하지 않은 채 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위험천만한 야외 농구장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재유가 묻자 별안간 오기가 생겨 응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뚜렷한 목표도 없이 공을 튀기던 오후 934. 저녁과 밤 사이. 점점 가빠 오는 숨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얘랑 뭐 하고 있는 거지?

 

옆에 앉아 페트병 물을 한 모금 들이켠 재유는 뜬금없는 이야기라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그리고는 마저 물을 삼켜내고서 음··· 목을 울리다 물음에 답했다.

 

아니, 친구는 아니고 싶네.”

 

나는 내가 물어놓고서 당황한 낯으로 웃는 얼굴의 재유를 돌아보았다.

 

전 팀원, 그냥 아는 애, 그런 거이고 싶지도 않고.”

“······.”

준수 니는 내랑 친구하고 싶나.”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알아듣기 힘들다. 친구 하고 싶냐니······. 듣고 보니 여태껏 누군가와 간절히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가 이 질문을 하게 된 경위를 떠올려본다.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종종 만나곤 했던 재유는 언젠가부터 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어느새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 소개한다면 졸업한 고등학교의 동창생 정도인 사이. 그러니까 요즘 부쩍 진재유와 멀어진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진재유를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재유는 나랑 친구는 아니고 싶다고 한다. 친구아니고 싶다는 게 무슨 말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난생처음 보는 수학 공식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어려워진다.

 

“···그거 말고 내가 너랑 뭐 될 수 있는 게 있어?”

 

재유는 짧게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닌 내랑 뭐가 되고 싶은데?”

 

동그란 뒤통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하다. 그 목소리에 되려 복잡해진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뭐든. 내가 너한테 뭔가, 뭐였으면 좋겠어. 아씨, 말로 설명 못하겠는데 그니까······.”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인 끝에

 

가까운 사람?”

 

드디어 고개를 든다.

 

너랑 가까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인 사이 말고,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생 따위 말고, 진재유가 기꺼이 친한 지인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 나는 재유에게 그런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농구공을 두어 번 튕기던 재유가 나를 슬쩍 돌아본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림을 향해 공을 쏜다.

 

그럼 잘 생각해 봐라, 그게 뭔지.”

그게 뭔데?”

내는 모르지.”

 

손끝에서 쏘아진 공은 깨끗하게 그물을 통과했으나 내 기분은 지저분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재유의 말을 곱씹는다.

 

전 팀원, 그냥 아는 애, 그런 거이고 싶지도 않고.

 

······그게 나랑 뭐가 달라? 나는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 별다른 정답을 고안해 내지 못한 채 그날 우리는 10시쯤 헤어졌고, 그렇게 며칠 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고민이 있는데요.”

우와, 준수가?”

 

단과대 건물 쉼터에서 병찬을 불러 세웠을 때, 병찬은 놀라는 건지 놀리는 건지 눈을 동그랗게 키우곤 그렇게 물었다. 뚱하니 있자니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된 그는 가방을 내려두곤 앉아 보라 손짓했다. 그래도 들을 태도는 된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살 많은 나이만큼 조숙한 면이 없지는 않은 형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이따위 질문을 하는 것이 사실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형은 친구가 형이랑 친구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

 

아리송한 표정의 형은 이내 내 어깨를 바짝 붙잡고 낮게 속살거렸다.

 

누가 너 괴롭혀?”

 

따돌림이라도 당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설핏 인상을 구겼다. 진재유 때문에 괴로우니까 누가 괴롭히냐 하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별로 재유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런 맥락으로 한 말도 아니고. 나는 형에게서 벗어나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아니 저는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걔는 아닌 거 같아서요.”

 

형은 가까이 붙였던 몸을 똑같이 물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 의외네. 너는 그런데 연연 안 할 거 같았는데.”

 

그렇긴 한데··· 걔는 좀 많이 친해서요.”

근데 걔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며. 걔한테 무슨 말 들은 거 있어?”

내가 너한테 친구냐고 했더니 친구는 아니고 싶다고 하던데요.”

 

형의 미소가 애매한 기색을 띤다.

 

··· 넌 걔한테 그걸 왜 물어봤냐?”

? 친구이고 싶으니까요.”

그니까, 네가 생각하는 친구란 게 뭔데? 걔랑 뭐가 되고 싶은 건데?”

형 걔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걔가 뭐라고 했는데?”

넌 나랑 뭐가 되고 싶냐고······.”

 

형은 이제 거의 측은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진재유 생각이 났다. 뭐야, 뭔데. 왜 나만 빼고 다 정답을 아는 거 같지? 꼭 왕따를 당하는 것만 같다.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 형은 어느새 미간이 잔뜩 좁혀진 나를 보고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을 해봐.”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고요.”

더 많이 생각해 봐······.”

아니, ······.”

그 이상은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참견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지, 그냥 고민 상담인데. 그때 형이 말한다.

 

원래 남의 연애에 쓸데없이 입 잘못 놀리면 화를 입는 법이란다.”

? 친구 얘기라니까요?”

 

형은 그러나 눈만 한번 찡긋해 보이곤 자리를 떴다. 고민 들어줬으니까 나중에 커피나 한 잔 사라! 호탕한 목소리와 함께 형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나는 그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았다. 저 형 얘기 들은 거 맞나. 뭔 연애······.

 

어휴······.”

 

됐다, 됐어. 조숙한 면은 개뿔이, 아무래도 의논 상대를 잘못 고른 듯했다. 그나마 의외로 입이 무거운 형이란 게 다행인가. 한숨을 내쉬며 뒤늦게 후회하던 나는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도 다음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늦지 않게 강의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모여 제법 큰 소음이 되고, 그러는 사이 비어있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 고개를 끄덕이고서 멍하니 빈 칠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1시 정각이 되어 교수가 들어오고, 막 출석을 부르려던 그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생 무슨 일 있나?”

“···아닙, 니다.”

 

쓰러질 뻔한 의자를 가까스로 붙잡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출석을 부르는 교수의 목소리와 함께 강의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날 수업은 거의 듣지 못했다.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진재유가 말한 가까운 사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서. 형이 왜 구태여 연애 상담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제야 알 것 같아서. 손에 쥔 샤프가 부러져라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씨발.

 

 

 

 

 

 

위로 둘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재유가 먼저 내 무릎 위를 차지하고 앉는 날. 그런 날이면 재유는 말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고, 그러면 나는 그의 허리를 단단히 잡아주곤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얼굴이 떨어지고 눈을 맞춘 뒤, 머리칼을 넘겨주면 어느 때는 웃음이 터지고 또 어느 때는 눈물이 터졌다. 눈물이 터진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차라리 침대 위에서 그가 흘린 눈물이 더 많을 정도로.

 

오늘은 그 많지 않은 날 중 하나였다. 나는 재유가 내보이는 값진 진심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온통 그에게 집중했으나 다시금 품에 몸을 구겨 넣은 재유는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재유, 이름을 불러도 마찬가지다. 이런 때에 할 수 있는 거라곤 한 가지뿐이었다.

 

나는 재유를 번쩍 들고일어났다. 나보다 작은 키여도 근육이 꽉 찬 성인 남성의 무게였으므로 팔에 제법 힘을 주어야 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평소라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벗어나려 들었을 재유는 되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다리를 꽉 옭아맬 뿐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침실 문턱을 넘는다. 곧 오늘 아침까지 함께 누워 잠을 청했던 침대에 도착한다.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은 손길로 그를 내려놓는다. 매트리스가 출렁이고, 어느새 우리는 밭은 숨을 내쉬고 있다. 재유는 울음에 숨이 차서, 나는 짧은 운동 후에 숨을 고르느냐고. 바보 같기도 한 풍경이 날숨과 들숨을 따라 흐른다.

 

차라리 울고 싶은 날도 있었는데 내는 눈물이 잘 안 나오더라.”

 

그러다 어느 순간 재유는 입을 연다.

 

근데 준수 니랑 있으면 자꾸 나와. 이상하지?”

 

한차례 눈물이 걷힌 자리에 웃음이 떠오른다. 나는 재유처럼 웃으며 그의 볼에 길에 남은 눈물 자국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재유는 간지럼을 타듯 자잘한 웃음소리를 흘렸고, 나는 이제 주근깨 점점이 내려앉은 볼을 빨아들인다.

 

니 고민 내가 다 먹어야겠다.”

 

속 안에서 홀로 삭히던 것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떠오른 흔적. 알아달라고. 나는 기꺼이 알아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없어지겠나.”

안 없어지지, 니가 말 안 해주면.”

 

흔적을 없애주지는 못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의 불만 한 톨, 슬픔 한 톨을 나누어 받는 것뿐이다.

 

재유는 미소를 갈무리하지 않은 채 결국 다시 얼굴을 묻고야 만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동그란 뒤통수를 나도 힘주어 껴안는다. 나누어 받는 것조차 오늘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일주일이 지나 해를 넘기고도. 하지만 언젠가 재유 안에서 몽땅 정리가 되고 나면 추억 삼아 이야기해 줄 것이다. 재유가 내게 터트리는 법을 배우듯이 나는 재유에게서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법 할 만한 일이지 않은가.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니 오늘은 이만큼으로 봐줄게. 나는 재유가 들었다면 건방지다고 했을 법한 생각을 하며 그의 등허리를 아프게 부둥켜 안았다.

 

 

 

 

 

 

사랑한다는 말

 

 

잠자리에 들기 전 불을 꺼 어두워진 침대에서,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운 나는 재유, 하고 불렀다.

 

?”

 

아직 졸음기는 없는 얼굴이 곧바로 돌아본다. 곧 있으면 잠이 쏟아질 것이므로 빨리 용건을 말해야 하는데 막상 입을 떼자니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재유는 의아한 듯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았고, 이윽고 그의 손이 내 귓바퀴를 간질일 때 나는 결국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이다지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평생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가장 화려한 슛을 던지곤 했던 나인데 말이다.

 

뭔 일 있나.”

 

그러나 걱정시킬만한 일도 아니기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든다. 머리칼을 가만 쓰다듬는 투박한 손길은 따듯했다. 묻기는 했으나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이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하기도 했다. 나는 재유의 손을 잡아다 내려 깍지를 꼈다.

 

아니··· 아까 낮에 얘기를 좀 들었는데.”

“······.”

연인 사이에도 애정 표현이 부족하면 관계가 악화된다나 뭐라나.”

······.”

“···말로 안 하면 저기한다잖아.”

 

재유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볼이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얼마나 많이 당했던가. 나는 성질을 부리듯 한숨을 내뱉고는 이실직고했다.

 

그래서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그게 다야.”

 

으하하, 재유가 웃는다.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그러는 너는 얼마나 말해보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마주 보고 있노라면 그냥 느껴지니까.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 알알이 담긴 재유의 마음이. 다만 나는 그 마음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나는 말없이 느껴도 재유는 말이 필요하다고 바랄지도 모르니까. 재유도 어쩌면 말하려고 나를 쳐다보았다가 막상 눈이 마주치자 입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적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준수.”

 

차차 웃음이 잦아들며 재유가 나를 부른다. 잡아 내렸던 손을 다시 올리고 싶은 눈치였으나 내가 부득불 잡고 있자 몸을 가까이 붙인다. 이마가 거의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우리는 눈을 올려 서로를 본다. 그리고 재유는 속삭인다.

 

다 안다, 말 안 해도.

 

나는 눈꺼풀을 스스르 들어 올리며 재유와 같은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불도 다 꺼둔 한밤중의 침대. 씨름하듯 손을 부여잡고 베개를 맞댄 우리는 그렇게 킬킬 웃다 잠이 들었다.